인터넷방송

  • 서브 왼쪽

주일설교

6월 23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3.06.23 14:32 조회 1,636 추천 0
2013년 6월 23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3_Jun_23)
명목상의 성도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로마서2:23~29

 전기 사용에 대해서 이렇게 일기예보 하듯이 매일 방송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절전을 위하여 야간에 전등을 제한한 일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일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원전비리 때문입니다. 불량, 짝퉁 부품을 납품하고, 제어 케이블 성능검사 시험성적을 위조하여 뇌물 
수수와 연루된 특정업체를 선정해서 결국 가동이 중지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번 여름에 전력 
공급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품이 아닌 가짜 비품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웃지 못할 이야기 하나 소개합니다.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살 때 각 나라 
사람들마다 묻는 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은 “그 물건 돈을 얼마를 지불하면 살 수 있는가?”
를 묻고, 영국 사람은 “그 물건 얼마나 오래 쓰냐?”고 묻고, 프랑스 사람은 “그 물건 최신 유행이냐?”
라고 묻는 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그 물건 진짜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이들이 자주 쓰는 말 중에 하나도 “진짜?”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가 점점 부흥하여 조직화 되어가고, 사회적 영향력도 커져 가고, 교인들도 사회적 
주류로 중상층화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거룩한 염려를 피력했습니다. ‘나의 진정한 염려는 감리교회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형식적인, 명목상의 
성도로 추락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란 설교에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3:5)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참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의 윤리에서 사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갖고 있는 고민을 앞선 세대의 그 어떤 사람이 똑같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에 무한한 공감과 
연대감을 느낍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의 모델 같은 사도 바울도 이런 비슷한 고민을 했습니다. 내 안에 
속사람은 선과 의로움으로 살기를 원하는데, 육신의 욕망과 욕심 때문에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인간의 
불안전함 때문에 진지한 고민을 했습니다. 특별한 주님과의 만남으로 극적인 삶의 전향을 하고 하늘의 
은혜의 세계를 넘나드는 신비하고 놀라운 영적 은사의 체험을 경험하였고, 복음을 위해 일생을 바치며 
살아왔던 엄청난 대가인 사도 바울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 때문에 가슴을 쳤다는 것에 뼛속 
깊은 공감을 갖게 됩니다. 

 웨슬리 설교전집에 보면 존 웨슬리는 이렇게 자신의 명목상의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에 대하여 진솔하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명목상의 성도는 이름만 걸어놓은 성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입니다. 예배는 기본이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입니다. 
웨슬리의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정도로 여러 해를 살아왔습니다. 여기 있는 많은 사름들이 증언할 수 있는 바와 같습니다. 
나는 모든 악을 피하고 죄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시간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 했고 
모든 사람에게 대한 여러 가지의 선행의 기회를 전부 얻었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또는 조심스럽게 공적인 
또는 사적인 은총의 수단을 다 사용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도 철저하고 진지한 행동을 하려고 힘썼습니다. 
내 앞에 서 계시는 하나님께서 내 증인입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성실하게 하고 하나님께 봉사하려는 
진정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마음으로부터 바라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나 자신의 양심은 이 기간 중에 내가 단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 불과했다고 나를 향해 증언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자부심이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부심이 도를 
넘어 문제가 됐습니다. 자기들만 선택받은 하나님의 참 백성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자부심을 
가졌던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 율법 그리고 할례입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로 인해 더 
깊은 선민의식을 갖게 되었고,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표시,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걸 맞는 삶의 내용이 있어야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삶이 반영되지 않는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신앙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24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지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게 한다면 그 죄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영광을 받으시게 한다면 얼마나 뿌듯하고 감사하겠는가? 

 우리에게 묻게 하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명목상의 성도, 외양만 그리스도인, 무늬만 성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짝퉁으로, 가짜로 목회한다면 그 교회는 정말 비극입니다. 겉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교인 
명부에 이름이 등록되어 있다고 해서, 성경책을 들고 다닌다고 해서, 직분을 받았다고 해서, 교회에서 앞장서 여러 
일로 봉사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도 고민했고 존 웨슬리도 고민했던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그 변화된 증거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확실한 고백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알고 믿는 자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은총으로 내 죄가 씻겨 졌으며 죄의 종노릇하던 
노예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신분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감사로 인정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자가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본문 28절과 29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의 표식인 할례는 육신이 아니라 마음에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무룻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선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지나온 죄를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서 가슴을 
치며 통회하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할 십자가를 예수님이 나 대신 지셨다는 황송함에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결심을 고쳐먹고, 감추고 들어나지 않아서 그렇게 내놓으면 정말 
부끄러워 고개를 못들은 나 같은 죄인까지 살려주신 주 은혜가 놀랍고 고맙다고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늘 이기적인 
욕망과 욕심을 포장하고 교회를 위하는 척, 성도를 사랑하는 척했던 자기중심의 위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마음에 
자복과 통회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로서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은 마음의 변화, 내면의 
변화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외면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게 
되면 당연히 아버지의 말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존경하는 어르신의 말씀을 중히 여기는 것처럼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 희생 앞에 당연히 감사해야 하고 그 말씀을 귀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이 책망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25~26절 말씀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아무리 할례를 받았어도 율법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이 헛것이 된다는 것이지요.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주의 종을 통하여 전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살다보면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그의 인격과 삶, 그리고 얼굴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성품이 변하고 성격이 옛사람을 죽이고 성질이 각이 떠짐으로 바뀌게 됩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품은 자입니다.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배우려고 하는 자입니다. 늘 이해고 배려하고 양보하고 손해 보는 
태도와 자세를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긍정적인 자세로 방법을 찾지 늘 한 결 같이 부정적인 생각으로 핑계와 트집을 
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 그리스도인은 받은 은혜가 늘 크다고 고백하며 어떻게 하면 보답하며 살까 생각하고 내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보답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은 절대로 대충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보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내게 주어진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합니다. 

 특권층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대개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됩니다. 그 이유는 특권만 누리고 그에 따르는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다하면 특권을 누려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잘은 모르겠습니다. 설교 준비 
중에 읽은 것이어서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영국의 경우 영국 왕실에 예산이 많이 소요가 되도 영국 국민들은 흔쾌히 여깁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영국 왕실이 국가의 기반이라는 상징적 의미도 있지만 왕실 사람들이 특권을 누리는 한편 책임을 다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전쟁이 나면 왕자들이 먼저 참전한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당연히 왕실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고백하는 것처럼 남들이 갖고 있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있는 특권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 선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 외 우리는 지금 얼마나 
많은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특권을 누리면서 사명과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기꺼이 사명과 책임에 충성을 다합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첫 번째 도전을 갖게 한 것이 우리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생활태도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고, 자신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별 차이도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현 세상이 요구하는 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참된 확신과 기쁨과 능력이 삶에 풍성히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제자들 말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를 원하는 사람, 예수님을 닮고 싶은 거룩한 열망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고뇌가 있는 사람입니다. 
명목상의 성도로 사는 것이 괴롭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든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는 거룩한 몸부림을 갖게 됩니다. 
교회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처럼 살기위해 노력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사도바울의 고민이, 존 웨슬리의 고민이 저희들에게 있습니다. 긍휼이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명목상의 그리스인의 가면을 벗어 버리고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전글 : 6월 30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현재글 : 6월 23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다음글 : 6월 16일 설교 동영상입니다.